본문 바로가기

일상다반사

8,600원이 사라졌다 황당하다. 작년 1학기쯤인가, 학교 도서관에서 책을 빌렸었다. Html 프로그래밍에 관한 책이었는데 기말고사 준비하니, 뭐하니 결국 몇 자 보지도 못했다. 그러다 어느새 학기가 끝나버렸고, 나는 직장에 다니기 시작했다. 문제는 책을 반납해야 해서 도통 도서관에 갈 시간이 없었다는 거다. 학교 도서관이 열려 있는 시간에 나는 대개 직장에 있거나, 아님 집으로 퇴근하는 길이었다. 어쩔 수 없이 주말에 반납기에 책을 반납했다. 연체료도 따로 전달했던 것 같다. 비용도 정확히 기억하고 있다. 8,600원. 당시 직장은 다녔지만 일한지 얼마 안 되는 시점이었고, 월급도 다음달 말일에나 받을 수 있었다. 워낙 돈이 없었기 때문에 무척-무척-무척 힘들게 마련한 돈이었다. 없는 돈, 있는 돈 다 털었다. 연체료가 더 .. 더보기
비로소 한 해가 끝났다 짐을 정리했다. 옷들과 책, 책상과 냉장고, 조미료와 쌀. 지하철로 정거장 하나쯤 거리인 할인마트에서 가져 온 박스들에 차곡 차곡 쌓아 넣었다. 열댓박스 정도는 되나. 용달 기사님을 불러 짐을 옮겼다. 박스가 방에 한 가득인가 싶더니 물건을 꺼내니 정작 내용은 얼마 되지 않는다. 1년치 삶을 정리하는 데 드는 공간 치고 참 보잘 것 없다 싶다. 딱 1년이다. 곰팡이 냄새가 큼큼한 계단 두 개쯤 내려간 반지하, 햇볕이라고는 다른 집 벽에 반사된 빛이 겨우 들어오는 게 전부인 그늘 속에서 자취를 시작한 지 딱 1년이다. 내 삶 온전히 나 혼자 책임질 수 있다고 무작정 뛰쳐나온 지 1년. 이렇게 빨리 끝날 줄 몰랐다. 돌아보니 이 집에서 마음에 들었던 것이라곤 샤워기 수압과 지하철 역 인근이라는 게 전부였다... 더보기
꽤 괜찮은 시작이었다. 12월의 마지막 주, 회사와 계약이 끝났고 나는 백수가 되었다. 며칠은 늘어지게 잤고, 며칠은 늘어지게 놀았다. 여러모로 끔찍한 해였다. 배운 것이야 꽤 있지만 그 값을 주고 배울만한 가치가 있는 것들은 아니었다. 어쨌든 이 해의 마지막이라도 즐겁게 보내고 싶었다. 몇몇 친구들에게 연락을 해보았으나 제각기 바빴다. 약속했던 친구에게는 일이 생겼다. 대신 데이트를 하기로 했다. 쌀국수와 파인애플 볶음밥을 늦은 저녁으로 삼고, 코인노래방에 갔다. 이런 저런 노래를 불렀고, 나는 다시 80점의 벽 앞에서 좌절했다. 음치 아니면 박치 둘 중에 하나만 해야 하는데 나는 둘 다다. 노래방을 나서 집으로 돌아가는 길에, 나는 새해를 마주했다. 친구를 만났다. 마침 시간이 맞는 친구가 근처에 있었다. 보쌈을 안주로 맥.. 더보기
언젠가 살아 있다면 살아 있으면 언젠가 바뀔 것이다. 살아 있다면 언젠가 달라질 것이다. 너무나도 맞고 옳은 말이다. 달라진다. 오늘 지는 태양과 내일 뜨는 태양은 다르다. 오늘 먹었던 밥과 내일 쌀 똥은 다르다. 살아 있으면 달라지는 내일을 볼 수도 있다. 살아 있다면 말이다. 살아 있으면 말이다. 하지만 당장 하루를 살아남기가 버거운 이에게 언젠가는 나아질 수 있으니 일단은 살고보자는 말은 일종의 위로고문에 불과하다. 이런 식의 위로는 어떤 책임도 져주지 않는다. 그래서 살아 남았다고 치자. 만약 달라지지 않는다면. 달라지지 않아서 더 고통스럽기만 할 뿐, 다를 수 없어서 더 숨만 막혀올 뿐이다. 만약 그가 '그렇지만, 살아있으면 언젠가.'로 시작하는 잠언을 길게 읊조리던 당신을 원망한다면 그것이 대체 언제냐고 묻는다면.. 더보기
시간을 되돌리지 않기로 했다. 누구나 시간을 되돌리길 꿈꾼다. 일주일 전으로 돌아갈 수 있다면, 한 달 전으로 돌아갈 수 있다면, 아니 단 하루, 한 시간 전으로라도 돌아갈 수 있다면. 그렇게 머릿속으로 그때의 그때를 떠올린다. 되감는다. 그런 짓은 하지 말았어야 했는데. 그런 말은 하지 말았어야 했는데. 그런 일은 일어나지 말았어야 했는데. 그렇게 스스로의 실수와 미숙함과 멍청함을 되뇌이며 좌절과 낙담과 절망을 만끽하고 있을 때. 이렇게 생각한다. 자신은 다르게 행동할 거라고, 지금처럼 되지는 않았을 거라고, 분명 무언가는 달라질 것이라고 말이다. 과거로 돌아갈 수 있다면, 시간을 돌릴 수만 있다면. 몇 주 전 동네 슈퍼에서 샀던 누텔라와 아이스크림 영수증에 적혀 있는 날짜를 보며 생각한다. 망쳐버린 시험 탓일 수도 있겠다. 떨어진.. 더보기
쓸 일은 많은데, 쓸 글은 없다. 한 달 간 꽤 많은 글을 썼다. 중복기고한 글들과 글이 모자라 실리지 않게 된 것들까지 포함하면 족히 스물 다섯 개 쯤은 되는 것 같다. 그런데 도통 쓸모 있는 글을 써내지 못하고 있다. 크게 사랑스러운 글은 없었던 것 같다. 오랜 기간 생각하고, 오랜 기간 고민하고, 나름 정제해 내놓은 글들은 읽히지 않거나, 쉽게 무시당한다. 내가 모자라고 내가 부족한 탓이지만, 자괴감이 크다. 시류에 밀려 큰 고민 없이 금방 금방 써내려가게 된 글들이 '더 많이 팔린다'는 사실은 참 마음이 아픈 일이다. 나는 삶에서 시작하는 글을 쓰고 싶었다. 삶 주변의 작은 표현 하나로부터 글이 시작되길 바랐는데, 요즘 글의 출발점은 대부분 내가 아니라 타자였다. 서투른 관심이거나, 허영에 찬 시선이거나. 어쩌면 삶 자체가 피폐해.. 더보기
트웬티스 타임라인을 떠나며. 2015년 1월 10일. 제게는 여러모로 떨리는 날이었습니다. 트웬티스 타임라인 피쳐 에디터라는 이름, 첫 회의, 낯설었던 서강대학교의 교정, 멀게만 느껴지던 대흥역과 신촌역의 사이. 행여나 늦을까봐 몇 십분은 일찍 도착했었고, 일찍 도착한 그 시간만큼을 오롯이 뻘쭘한 표정으로 앉아 있는 데 써야 했습니다. 2016년 1월 9일, 오늘 딱 365일이 지났습니다. 영영 가지 않을 것 같던 2015년의 시간은, 실은 신촌역에서 대흥역까지의 거리만큼이나 짧았습니다. 그 짧은 시간 동안 저는 많이 성장하고, 또 많이 배웠습니다. 불분명하던 제 미래를 확실히 그리게 된 것도, 트웬티스 타임라인이라는 곳에서 좋은 분들을 많이 만났기 때문인지도 모르겠습니다. 부족한 글 때문에 늘 애써주셨던 김도현 편집장님, 늘 고생.. 더보기
그걸 그렇게 말하면 안됐다. "새해 벽두에 첫 스타 커플이 탄생했다." 많은 매체들이 김준수와 하니의 열애소식을 보도하며 이런 문장을 쓰고 있다. 좀 우습다. 새해 벽두에 첫 스타 커플이 탄생했단다. 의문. 그들이 1월 1일 땡 치고서 자 그럼 우리 오늘부터 1일이야,한 게 아닌 이상에야 커플이 ‘탄생’했다고 이야기할 수 있는 건가. 디스패치에 따르면, 그들은 6개월 전부터 연애를 하고 있었다. (소속사는 구체적인 시기는 밝히지 않았다.) 6개월 전에 커플은 이미 탄생했었다. 새해 벽두는, 다시 말하자면 그냥 그들의 연애가 세상에 공개된(혹은 까발려진) 날일 뿐이었다. 연예계 안에서 그런 식으로 취급되는 것은, 비단 연애만이 아니다. 사람의 재능도 탄생되고, 목소리도, 얼굴도, 몸매도, 탄생한다. 이전에는 존재하지 않던 것이 갑자기.. 더보기
2015년을 보내며. 도무지 가지 않을 것 같던 2015년이 다 가버렸다. 작년의 이 날 이 시간, 나는 친구랑 같이 있었던 것 같다. 술을 마시고 있었던 것도 같고, 치킨을 먹고 있었던 것도 같다. 연애나 축구에 관한 진부한 이야기와 진부한 고민들을 나누었던 듯도 하고, 약간 취한 채 어질러진 기분으로 낯선 방에 누워 있었던 듯도 하다. 친구는 먼저 잠 들었다. 내 옆에서였는지, 아니면 다른 방에 가 문을 잠그고 잠이 들었는지 기억은 나지 않는다. 새해가 땡 하고, 스물 네 살이 되었다는 걸 느끼고 조금은 허탈해했다. 지금 이때가 되도록 뭘했나, 내 옆에 남은 사람들이 별로 없구나. 그런 생각. 그래서 지인들에게 페이스북 메시지를 보내기 시작했다. 새해 복 많이 받으세요. 잘 지내세요, 새해 복 많이 받아요. 올해는 부디 .. 더보기
<뷰티 인사이드>, 크리스마스, 사랑. 는 참 예쁜 영화다. 내 생일에 세상 밖으로 나와서인지 몰라도 괜시리 정이 간다. 일종의 생일선물,같았다. 영화적 허술함을 지적하자면 할 말이 정말 많겠지만, 굳이 그러고 싶지는 않다. 다시 말하자면, 이 영화는 내게 평가보다 감상을 하고 싶게 하는, 그런 종류의 영화다. 는 참 예쁜 영화다. 아닌 게 아니라 정말로 그렇다. 색감, 배우들의 감정선, 표정과 배경까지, 참 예뻤다. 라는 이 영화의 제목이 거짓말처럼 들릴만큼. 영화는 우진의 시점에서 전개되지만, 사실 주인공은 우진이 아니라 한효주가 연기한 이수였는지 모르겠다. 이수는 혼란스러워하고, 아파하고, 눈물 흘리고, 불안해 하다가- 그 힘겨움을 극복해낸다. 이수는 인정할 줄 알았다. 우진의 겉모습만 변한 게 아니라는 걸. 스스로의 마음 역시 계속 변.. 더보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