짐을 정리했다. 옷들과 책, 책상과 냉장고, 조미료와 쌀. 지하철로 정거장 하나쯤 거리인 할인마트에서 가져 온 박스들에 차곡 차곡 쌓아 넣었다. 열댓박스 정도는 되나. 용달 기사님을 불러 짐을 옮겼다. 박스가 방에 한 가득인가 싶더니 물건을 꺼내니 정작 내용은 얼마 되지 않는다. 1년치 삶을 정리하는 데 드는 공간 치고 참 보잘 것 없다 싶다.
딱 1년이다. 곰팡이 냄새가 큼큼한 계단 두 개쯤 내려간 반지하, 햇볕이라고는 다른 집 벽에 반사된 빛이 겨우 들어오는 게 전부인 그늘 속에서 자취를 시작한 지 딱 1년이다. 내 삶 온전히 나 혼자 책임질 수 있다고 무작정 뛰쳐나온 지 1년. 이렇게 빨리 끝날 줄 몰랐다.
돌아보니 이 집에서 마음에 들었던 것이라곤 샤워기 수압과 지하철 역 인근이라는 게 전부였다. 집을 계약하던 날 해는 벌써 졌고, 급하게 방을 보며 제대로 확인할 수 있었던 유일한 것이었다. 방을 쓱 둘러 보며 적당히 크네, 몇 명 같이 살기는 딱 적당하겠네, 라고 생각한 뒤, “빨리 계약 안 하시면 금방 빠질 거예요.”라는 말에 속아 계약했던 2015년 12월의 어느 날이었다.
이 집과 함께한 한 해는 참 즐거웠고 참 힘겨웠다. 삶의 무게는 생각보다 더 버거운 것이었고, 삶다운 삶을 위해서는 생각보다 더 많은 힘을 쏟아야 했다. 씨리얼이 아닌, 제대로 된 아침을 차리기 위해서는 평소보다 한 시간은 빨리 일어나야 했다. 좀 더 괜찮은 반찬을 먹으려면 비용도, 시간도 더 많이 투자해야 했다. 밥을 제때 먹지 않으면 싸구려 전기 밥솥 속에서 밥은 더 딱딱해져만 갔다.
어느 순간부터는 그 딱딱한 밥도 참 귀해졌다. 내 방이지만 내 집은 아닌 곳. 이곳에서는 숨만 쉬어도 돈이었다. 월세, 공과금, 식비와 휴대폰 요금, 인터넷 요금 등을 비롯한 생활비. 벌어야 했다. 많은 일을 했다. 글을 쓰고 받는 원고료는 몇 끼 밥 값 정도만 될 뿐이었다.
많은 일들을 했다. 내가 쓰고 싶은 글을 쓰는 일은 생활에 겨우 보탬이 될 뿐이었다. 어떤 때에는 자동차 회사, 또 어떤 때에는 의류 회사, 또 어떤 때에는 비뇨기과, 다시 어떤 때에는 대기업. 홍보하고, 칭찬하고, 다시 홍보하고, 소개하고, 안내하고, 블로그를 운영하고. 어쩐지 그런 글만 쓰게 되었다.
이 집에 왔다 머물다 간 이들도 생각난다. 하룻밤이든, 이틀이든, 한 달이든, 여섯 달이든. 어떤 인연은 참 끔찍했고, 어떤 인연은 참 행복했다. 짧은 묘연도 있었다. 그 아기 고양이는 벌써 성묘가 다 되었을 테다. 아프지 말고 잘 지내고 있으면 좋으련만.
지난 한 해는 참 아팠고 참 행복했다. 그렇게 힘겨울 수 없었다. 또 그렇게 즐거울 수 없었다. 대체 언제 친구들과 또 그렇게 놀고, 그렇게 울고, 그렇게 웃어볼까. 그 날들도 이제는 끝났다.
남들보다는 조금 더 늦게, 비로소 한 해가 끝났다는 느낌이 든다.
'일상다반사 > 에세이' 카테고리의 다른 글
8,600원이 사라졌다 (0) | 2017.03.17 |
---|---|
언젠가 살아 있다면 (0) | 2016.04.18 |
시간을 되돌리지 않기로 했다. (0) | 2016.04.16 |
2015년을 보내며. (0) | 2016.01.01 |
<뷰티 인사이드>, 크리스마스, 사랑. (0) | 2015.12.21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