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리는 때로 말하는 것과 반대로 행동한다. 말을 할 때는 모두 다 간디주의자라도 된 듯하다. “폭력은 나쁜 거야”라고 도덕교과서 23페이지 하단쯤에 적혀 있을 말을 하곤 하니까. 그러나 때때로 자신조차 몰랐던 내면의 폭력성과 마주하게 된다. 날 분노케 한 누군가를 보며 살의를 품기도 하고, 교실과 직장에서 누군가를 따돌리고 있다면 이지메의 적극적인 방조자가 되기도 한다.
말과 말이 다를 때도 있겠지. 어떤 정치인은 이것이 잘못된 것이라고 이야기하다가, 다른 순간에는 그것이 잘못된 것이 아니라는 식으로 말을 한다. 비단 정치인들만 그렇지도 않다. 우리도 역시 최고의 창과 최고의 방패를 한 손에 들고 있을 때가 있으니까. 인터넷 게시판과 SNS는 누가 어디서 창을 들었고, 또 어디서 방패를 들었는지 알기 쉽게 만들었다. 이른바 ‘신상털이’랄까. 그 말들은 한 박스 안에 담겨 게시되고 전시된다. “얘 좀 보래요.”라고 말하면서 모두 돌을 던진다. ...“씹선비들. 너희들도 말만 그런 거잖아. 우리는 솔직하다고.” 그러나 과연 누구라고 돌을 던질 자격이 있을까. 예수라면 분명, “너희 중 죄없는 자가 이 사람에게 돌을 던져라”라고 댓글을 달았을 것이다.
사도 바오로조차 로마서에서 그리스도인들에게 이렇게 고백한다. “사실 내 안에, 곧 내 육 안에 선이 자리 잡고 있지 않음을 나는 압니다. 나에게 원의가 있기는 하지만 그 좋은 것을 하지는 못합니다. 선을 바라면서도 하지 못하고, 악을 바라지 않으면서도 그것을 하고 맙니다. 그래서 내가 바라지 않는 것을 하면, 그 일을 하는 것은 더 이상 내가 아니라 내 안에 자리 잡은 죄입니다.” 예수의 말을 전하는 그조차도 사실은 악행을 저지르는 사람이고, 선하지만은 않다고. 그는 자신 안에 ‘죄’가 있다고 이야기한다. 나는 여기서 ‘종교적 해석’을 걷어내고, 이 죄에 대해 논하고자 한다. 대체 이 ‘죄’란 무엇일까.
나는 ‘인간 안에 악마가 있다’는 시시하고 유치한 컬트 서스펜스를 이야기하려는 것이 아니다. 다만, 그것이 ‘악마’가 아니면 무엇일지를 생각해야 한다는 것이다. 나는 그것이 죄도, 악마도 아니라 그저 인간, 그 자신의 본래 모습이라고 믿는다. 과연 어떤 인간이 한 결의 모순도 없이 깨끗할 수 있다는 말인가. 그 어떤 인간이 분열적이지 않을 수 있다는 말인가. 그럴 수 있다는 사람이 있거든, 나는 나에게 돌이 아니라 총이라도 던지라고 할 테다. 쏘는 건 좀...
이렇게 살아야 한다. 이렇게 해야지,라고 이야기하면서 그렇게 행동하지 못하는 이들을 우리는 많이 보아왔다. 이렇게 해야지,라고 이야기하던 사람이 몇 년 후에 돌변하는 경우도 봤을 것이다. 그러나 나는 그것이 ‘잘못’이라고 생각하지는 않는다. 인간은 분열적인 존재이니까. 모순적인 존재이니까. (그러나 그것이 약속이라면 다르겠지.) 그래서 나는 인터넷에서 누군가의 옛기록을 열심히 신상털이해가며 현재의 그와 끊임없이 대조하려는 작업에서 그 어떤 의미도 찾을 수 없다. 말만 씹선비가 되지 말고 행동도 씹선비가 되라는 이들을 나는 신뢰하지 않는다. 나는 내가 때로 모순적일 수 있다는 사실을 부끄러워하지 않는다. ‘모든 생활은 분열과 모순에 의해서 기름지게 되는 것이요, 꽃이 피게 되는 것’이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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