카로는 평범한 중학생이었다. "POST THE MOST!" 그 캐치프레이즈를 만나기 전까지만 해도! 소셜 네트워크 서비스인 ‘ON’에 가입하면서부터 그녀의 일상은 달라지기 시작했다. ON에 가입한 그녀는, 정말 많은 ‘가상의 친구들(Virtual Friends)’을 갖게 된다. 그녀의 반에 전학 온 ‘차도녀’ 야나 마리아 볼프도 그 중 하나였고 말이야. ON을 통해 야나와 친해진 카로 그리고 동급생 에디는, 야나로부터 ‘ON-SHOW’에 대한 이야기를 듣게 된다. ON-SHOW는 ON에서 만든 방송이었다. 각국에서 한 명 씩, ON의 가입자들을 모아 쇼 프로그램을 만들겠다는 계획. ‘뽑히기만 한다면’ 세계적인 스타가 될 기회였다. 많은 이들의 선망과 관심, 응원을 받는! 그러나 그게 쉬울 리가 있나. ON-SHOW의 ‘앵커’가 되기 위해서는 포인트를 모아야 했다. 그것도 아주 많이. 야나와 카로, 에디는 좋아요-포인트를 주고 받으며 ‘ON-SHOW’를 향한 경쟁을 시작한다.
여기까지는 뭐, 그래 어쩌면 아주 뻔한 청소년 드라마의 시작 같겠지. 그러나 ‘ON-SHOW’는 그들에게 어떤 아름다운 성장도 허락하지 않았다. ‘좋아요’를 얻기 위해서는 경쟁을 해야 했고, 경쟁에서 이기기 위해선 자극적이어야 했다. 그들은 더 많은 ‘좋아요’를 얻기 위해 주위의 ‘모든 것’을 포스트하기 시작했다.
솟아오르는 콜라 분수를 얼굴로 맞아내는 영상 따위는 웃음거리에 불과했다. ‘우스꽝스러운 모습’ 그리고 ‘자극적인 장면’을 찾아내기 위해 동분서주하던 그들은 ‘발견’을 포기하고, ‘발명’을 시작했다. 학교에서 열린 파티-. 선생님들에게 보드카를 먹여 취한 모습을 찍어내고, 수영장에 똥이나 피라냐를 풀까, 고민하다 선생님의 아내와 젊은 청년(아들이었다)이 함께 있는 장면을 찍어 불륜처럼 편집해 포인트를 올리고, 피곤한 수학여행에 곯아떨어진 친구의 손에 술잔을 들려 술에 취한 것처럼 속이고!
이 경쟁이 어떤 파국을 불러왔을까? 이 ‘스타’가 되고자 하는 순수한 열망이 무슨 결말을 불러왔을까? 굳이 여기서 내용을 몽땅 스포일러하고 싶지는 않다. 이 책을 읽어 볼 사람이 얼마나 될까 싶긴 하지만. 혹시나 모를 1퍼센트를 위해서 말이야. (아, 이 책은 토마스 파이벨(Thomas Feibel)의 <좋아요를 눌러줘(Like me-Jeder Klick zählt)>다.)
재밌는 이야기책을 읽어드렸으니 이제는 본론으로 들어가 봐도 괜찮겠지요? 이 이야기들, 어디서 많이 본 것 같지 않은가. 아마 많은 이들이 눈치 챘겠지만, 나는 페이스북을 비롯한 넷 커뮤니티에 관해 이야기하고자 한다. 많은 사람들이 ‘페북스타’가 되기를 원한다. 영상 하나에 좋아요 10만개, 사진 한 장에 좋아요 5만 개, 글 하나에 좋아요 3만 개. 수백 수천 개의 댓글을 달고 사는 좋아요 수집가만을 이야기하는 것은 아니다. 페이스북을 이용하는 이라면 모두 자신의 친구-팔로워들 사이에서의 주목을 원하며 더 많은 좋아요를 받기 원한다는 뜻이다. (나도 그렇다.)
그렇다. 이것은 일종의 주목경제요, 주목경쟁이다. 주목경제의 개념은, 인지심리학자 히버트 사이먼의 ‘정보 풍요’, 주어지는 정보가 많아질수록, 관심, 즉 주목이라는 자원이 희소해진다는 착안에서 비롯되었다. 그리고 이는 스마트폰 시대로 넘어오면서 더욱 심화되었다. 꼰대 아저씨들은 ‘요즘 어린 애들이 핸드폰 보느라 책을 보지 않는다.’고 걱정하지만, 실은 ‘요즘 어린 애들이 핸드폰으로 접하는’ 정보량이 그 이전 시대에 책 등의 구-매체를 통해 접하던 정보량을 압도하는 지경에 이르렀다. (텍스트의 질은 논외로 치자.) 스마트폰이 우리가 하루 종일 수많은 텍스트 속에 갇혀 살도록 만든 것이다. 우리는 이 텍스트들 속에서 무언가를 선별적으로 ‘주목’해야 한다. 이것은 동시에, 우리가 타인의 관심을 얻기 위해서는 또 다른 누군가와 ‘경쟁’해야 함을 뜻하기도 한다. 우리는 페이스북에서 우리의 친구들과 더 많은 주목을 받기 위해 경쟁을 하고 있는 것일지도 모른다.
‘주목경쟁’ 개념은 찰스 데버, 토머스 데이븐포트 등의 사회학자, 경영학자들이 발전 시켜 온 개념이다. 찰스 데버는 그의 저서 <주목의 추구(the Persuit of Attention)>에서 대중문화와 소비자본주의가 개개인이 받는 주목에 대해 필요 이상의 욕망과 결핍을 갖게 했다고 주장한다. 타인의 주목을 ‘쟁취’하는 것이 최우선적인 과제가 되었다는 뜻이다.
그 ‘주목’이 페이스북에서는 곧 ‘좋아요’일 것이며, ‘ON’에서는 포인트일 것이다. 그리고 어쩌면 페이스북만 그런 것은 아니겠지. 트위터에서는 ‘주목’의 크기가 팔로워와 리트윗 수로 증명된다. 많은 트위터리안들이 자신의 팔로워 숫자나 리트윗 수에 집착하는 것 역시 비슷한 이유에서이다. 팔로워 수가 많다는 것은 그만큼 주목 받고 있다는 뜻이고, (잘 만들어진 우물 같은) 트위터 세계 속에서 큰 영향력을 갖는다는 것을 의미하니까. 트위터는 그 특징인 속도와 간편함 때문에 각종 루머가 손쉽게 퍼져나가는 창구가 되었다. 누군가는 주목을 위해 스스로를 속이고 있을지 모르는 일이다.
각종 커뮤니티들, 또한 별 다르지 않다. 오늘의 유머에서는 추천이, 일간베스트 저장소에서는 일베 버튼이 ‘주목’을 나타내는 포인트가 된다. 싸커라인, 엠엘비파크, 클리앙 같은 커뮤니티 역시 마찬가지다. 주목을 받은 글은 더 많은 이들에게 노출되고, 더 많은 관심을 받을 수 있다. 게시판에서 흔히 볼 수 있는 소위 ‘관심종자’들, ‘관심병’들, 거기에 ‘어그로’들까지. 모두 일종의 주목경쟁을 통해 만들어진 것이라는 해석도 가능하다. 일베의 시초가 디씨인사이드에서 많은 ‘주목’을 받던 베스트 글들이 삭제되기 전에 옮겨오던 ‘저장소’ 개념의 게시판이었다는 것을 상기해봐도 좋을걸.
페이스북도 이와 같은 양상이다. 우리가 더 많은 ‘좋아요’를 받기 위해 모두 자신의 사연을 조작하고, 편집한다고 말하고 있는 것이 아니다. 다만, 페이스북의 좋아요-구조는 우리가 ‘주목’받을 글들만, 또 ‘좋아요’가 눌릴만한 글들만 쓰도록 요구하고 있다는 거지. 물론 당신이 “나는 안 그런데? 아닌데? 아닌데?” 하면 내가 딱히 해줄 말은 없지만 말이야.
‘주목’받을만한 글만 적게 만드는 것이 위험한 이유가 뭐냐고 물으려나. 특정 관계망에서 주목 받는 글은 특정한 성향을 띄게 된다. 일베와 유사한 구조를 지닌 커뮤니티들을 살펴보자. 이런 게시판들에서는, 커뮤니티의 의견은 추천-비추천 시스템에 의해 너무 쉽게 대표되게 된다. 의제를 선점한 의견, ‘베스트’가 된 게시글은 동조자들에 의해 확산되고 확장되는 경향이 강하다. 반대발언은 다수의 비추천에 의해 ‘삭제’되고, 그 결과 반대자들은 “말해봤자 또 비추 먹을텐데 뭐”라고 말하며 입을 다무는 관중화(spectatoring)가 이루어지게 되는 구조. 다수의 의견은 계속 절대적 다수를 차지하지만 반박과 이견은 소수에 머물게 되어, 의견이 실제 이상으로 과잉대표화되는 구조. 이 대표화된 주장을 커뮤니티 이용자가 자신의 생각과 일치화 하게 하는 구조. 이 구조화된 우물은 그 자체로 반민주적일뿐더러, 논쟁을 통해 커뮤니티가 성숙할 기회도 잃게 만든다는 점에서 최악이라 할만하다.
페이스북 역시 이용자 스스로 구성한 커뮤니티의 일종이라는 점에서 유사점을 찾을 수 있을 듯하다. 페이스북 역시 거대한 ‘주목경쟁’의 장(場)이다. 다만 페이스북에는 ‘의견’보다 ‘삶’이 과잉대표화되는 경향이 강하다. 이 파란 미술관에 전시되는 ‘삶’들은 대체로 아름답고 즐겁다. 맛있는 음식이 식탁에 늘 가득하며, 항상 날 사랑하는 애인이 있고, 주말마다 새로운 즐길 거리를 찾는 삶. 잘생긴 얼굴과 좋은 몸. 빼어난 유머 감각과 뭐 하나 대단한 특기. 페이스북은 그렇게 삶의 하이라이트만을 소비한다. ‘쓰이지’ 않는 삶의 다른 부분들, 즉 좋아요가 눌리지 않을만한 삶들은 이 미술관에선 찾아 볼 수 없다. 어둠도 밝음도 없는 삶의 조각은 페이스북에선 불청객이 될 게 뻔하다. 결국 좋아요-경쟁의 패배자가 될 뿐이다.
페이스북이 SNS 우울증과 상대적 박탈감을 유발한다는 연구 결과는 딱히 놀라울 것도 없다. 미주리과학기술대의 한 연구팀은 대학생 216명의 인터넷 사용습관과 정신건강 상태를 조사해 왔다. 결과는 자명했다. SNS 사용시간이 길수록, 우울증에 걸릴 가능성이 높아진다는 것. 페이스북은 타인의 삶의 화려함만을 조명해 왔다. 지난 3월 호주에서는 ‘좋아요’수 부족이 이용자의 자존감을 낮춘다는 연구결과마저 있었다. 이 ‘좋아요’로 쌓아올린 우리의 담벼락이 결국 우리가 싫어하는 것들을 상기시켜 온 것이다. 게시글에 달린 ‘좋아요’ 숫자에 대한 집착을 버리면, 아마 좀 다른 세상이 보일지도 모르겠다. 여기 재밌는 실험이 몇 개 있다.
<와이어드>의 매트 호난 기자가 쓴 기사를 보자. 그는 이틀 동안 페이스북에서 본 모든 글에 ‘좋아요’를 누르는 실험을 했다. 결과가 어땠을 것 같나. (어쩌면) 예상대로, 그의 뉴스피드는 온갖 광고와 자극적인 게시글들로 난장판이 되었다. 이번엔 앨런 모건이라는 블로거가 전혀 다른 실험을 했다. 2주 동안 좋아요 버튼을 ‘전혀’ 누르지 않는 것이었다. 2주 후, 그의 뉴스피드는 완전히 깨끗해졌다. 오직 친구들이 쓴 글들만을 볼 수 있었다. 어느 글에도 ‘좋아요’ 버튼을 누르지 않으면 페이스북이 우리에게 어떤 글을 ‘우선순위로’ 보여주어야 할지 알고리즘을 계산할 수 없기 때문이다. 페이스북의 알고리즘은 단순하고, 멍청하다. 당신이 특정 정당을 비판하는 글에 ‘좋아요’를 눌렀다면, 페이스북은 그 정당을 칭찬하는 글을 당신의 뉴스피드에 가져다 줄 수도 있다. 페이스북의 알고리즘은 그 둘 간의 차이를 구분하지 못하기 때문이다. 당신이 누르는 ‘좋아요’가 결국 당신의 타임라인을 당신이 별로 보고 싶어하지 않는 것들로 도배하게 될 가능성이 농후하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몇 명이 좋아요를 눌렀는지 궁금하다면, 좋아요 버튼에 계속 손이 간다면 이 앱을 추천한다. 당신이 ‘좋아요’가 없는 페이스북을 원한다면, 당신의 브라우저에 ‘Neutralike’를 설치해보라. 이 앱과 함께라면 당신은 당신의 글에 누가 좋아요를 눌렀는지 알 수 없다. 좋아요를 누를 수도 없다! 좋아요 없는 페이스북이 무슨 의미가 있냐고? 글쎄. 적어도 위의 실험에서 보여준 것처럼, 당신은 정말 당신이 좋아하는 게시글을 볼 수 있게 될 것이다. 깨끗한 뉴스피드는 덤이다. 앨런 모건은 ‘좋아요’를 누르지 않게 된 이후, 댓글을 더 많이 쓰게 되었다고 말한다. 버튼 하나로 대체된 불분명한 ‘소통’이 사라지고, 진정한 페이스북의 의미를 찾을 수 있게 되었다는 것이다.
조금 더 극단적인 실험도 있다. 예술가 벤자민 그로서는 페이스북에서 숫자를 완전히 지워버렸다. 벤자민 그로서가 만든 숫자제거기(Demetricator)를 사용해보자. ‘좋아요’를 누를 수 있지만 몇 명이 눌렀는지는 알려주지 않는다. 그저 ‘사람들이 좋아합니다.’라고 말할 뿐이다. 몇 명이 댓글을 남겼는지 역시 볼 수 없다. 심지어 언제 쓰인 게시글인지조차 알 수 없다. 그저 ‘최근(recently)’이라고 표기할 뿐이다. 이 ‘숫자제거기’를 사용한 이들은 ‘좋아요를 받아야 한다는 무언의 압박감에서 벗어났다.’고 말한다. 숫자의 변화를 끊임없이 확인하던 자신의 과거를 상기하며 ‘명상을 얻게 된 기분’이라고까지 말하는 이들도 있었다.
벤자민 그로서는 ‘페이스북 숫자제거기’라는 실험으로, 우리에게 SNS에서 숫자가 얼마나 중요한지를 명확히 보여주었다. 이 페이스북이라는 경쟁의 장. 페이스북이 만들어 낸 주목경쟁은 명료하고 직설적이다. 좋아요가 눌린 글들을 자신들의 알고리즘에 따라 ‘인기순’으로 정렬해주고, 몇 개의 좋아요가, 몇 개의 댓글이 달렸는지 실시간으로 보고해준다. 이 ‘숫자’가 엄청나고 대단한 의미가 있는 양 보이게 하는 것이다. ‘좋아요’ 수와 댓글 숫자가 온라인에서의 아이덴티티를 결정하는 것처럼 말이다. 이 ‘좋아요’ 아니면 ‘아무것도 아닌 것’으로 나뉘는 세계에서, 우리는 ‘아무것도 아닌 것’이 되지 않기 위해 ‘경쟁’한다. 그러나 아무런 댓글도 달리지 않으면, 누구도 좋아요를 누르지 않으면 그 글은, 그 사진은 아무런 의미도 없는 것인가. 이런 시각은 비극을 불러온다.
시계를 2014년 12월 10일로 돌려보자. 전북 익산시의 한 성당. 재미동포 신은미 씨와 황선 전 통합진보당 비례대표 후보의 토크콘서트 현장. 한 고교생의 손에서 폭탄이 던져졌다. 백색테러였다. 그러나 ‘백색테러’라는 이름으로 간단히 정의하기에 찝찝한 구석이 많다. 정치적 목적을 띄는 것처럼 보이긴 하지만, 사건의 내막을 파고 들어가면, 이것이 과연 ‘정치적 목적’인지 의심스럽다. 오 씨는 범행 계획과 과정을 애니메이션 커뮤니티인 ‘네오아니메’에 수차례 게시했다. ‘드디어 인생의 목표를 발견했다’며 ‘신은미 폭사하면 내가 그런 줄 알라’고 했다. 오 씨는 ‘네오아니메’ 뿐 아니라 ‘내일 종북 콘서트 간다’며 일베에도 예고 글을 올렸다. 때문인지 이 사건은 ‘일베 고교생 테러’라 불렸지만, 그는 일베에서 ‘밴(정지)’당한 상태였다. 예고, 중계글을 올린 아이디는 “친구 것을 빌린 것”이라는 경찰 관계자의 말이 이어졌다.
시사 인의 보도에 따르면, 그는 오프라인보다는 온라인에 더 강한 소속감을 느끼는 사람이었다. 그러나 그는 어느 커뮤니티에서도 쉽게 주목 받지 못했다. 그가 남긴 글은 대부분 ‘무플’이었다. 그는 주목을 받기 위해 어그로를 끌었고, 주목과 함께 돌아온 건 강제 퇴장과 밴이었다. 일베에 발을 담기 이전, 그는 오랫동안 웃대에서 활동했다고 한다. 웃대에서도 마찬가지로 차단이 이어졌다. 아이디를 여섯 개나 돌려썼지만, 아이피 차단을 막을 수는 없었다. 그가 “3년간 지내던 곳을 뜨려니 발이 떨어지지 않는다.”며 남긴 마지막 게시글에 달린 베플. “진짜 몰라서 그러는데 님 누구세여?”
그는 일관적인 정치성향을 보이지 않는다. 그는 지난해 10월 자신의 정치적 이념이 어떻게 변화해왔는가 글을 쓴 적이 있다. 호남 혐오자들을 만나고 진보적 성향을 갖게 됐다. 한미FTA 논란 이후 진보 세력에게 환멸을 느꼈다. 진보를 혐오해 보수 쪽에 서 있지만, 사람 됨됨이는 진보가 낫다고 생각한다. 그의 주장이다. 그는 일베에서는 보수적 성향을 거리낌 없이 드러냈지만, 반면 웃대에서는 대선 개입과 통진당 사태 등 관련하여 박근혜 정부를 비판하는 글을 올리기도 했다. 그는 일관된 정치성향을 가지지 않았다. 대신 그는 ‘일관적으로’ 관심과 소속감을 원했다. 그러나 웃대도 일베도 그를 반겨주질 않았다. 이것이 내가 이 사건을 백색테러라고 부르기 망설이는 이유다. 그저, 커뮤니티가 요구하는 극단적 주목경쟁의 끝에 일어난 비극일 뿐이다. (너무 극단적인 예라고 말하려나. 하지만 모든 사건, 모든 사고는 극단적이다. 9.11 테러. 동일본대지진과 후쿠시마 핵발전소. 세월호 사고. 삼풍백화점 붕괴. 차라리 삶 자체가 극단의 연속이라 하겠다. 그렇기에 우리는 극단으로부터 배워야 한다. 배우지 않으면 사고는 되풀이 된다. 역사는 반복된다.)
‘좋아요’ 아니면 ‘아무것도 아닌’ 세계인 페이스북. 페이스북은 이런 ‘극단’의 가능성을 얼마든지 안고 있다. 당신이 정말 페이스북을 통해 ‘소통’이란 것을 하고 싶다면 ‘좋아요’ 버튼을 잠시 잊어버려라. 당신이 ‘좋아’할수록 당신이 좋아하지 않는 것들로 당신의 페이스북은 가득 차게 될 테니까. 아니 어쩌면, 페이스북 자체를 좋아할 수 없게 될지도 모르겠다. 일베가 일베만의 극단성으로 가득 차게 된 것은 ‘일베’와 ‘민주화’로 구분되는 일베의 추천 시스템 덕이었다는 사실은 이미 너무 많이 얘기된 분석들이다. 페이스북을 그만두라는 얘기를 하는 건 아니다. 다만 페이스북을 통해 무얼 얻고자 하는지, 그 인터넷 커뮤니티에서 찾으려 했던 게 무엇인지를 함께 고민해 봤으면 좋겠다. ‘좋아요’ 버튼은 우리 삶의 본질과는 아무 상관도 없지 않나.
<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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