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자기계발서, 이제 읽지 맙시다.

 

자기계발서이제 읽지 맙시다.

 

삶이 곧 입시이던 때가 있었다나는 사이비종교에 빠진 교인 마냥 공부했다아침에 일어나 영어듣기평가 파일을 들으며 학교에 가고학교에 도착해서는 영어단어를 외우고 시험을 봤다입시가 닥쳐오자 대부분의 선생님들은 수업 시간에 자습을 시켰는데나는 수능 시간표를 따라 1교시와 2교시엔 언어를, 3교시와 4교시엔 수리를 풀었다점심시간에도 놀 수만은 없었다잠시 교정 주변을 산책한 뒤에자리로 돌아와 다시 영단어를 외웠다오후도 비슷했다내 하루는 오로지 문제집과 영단어장오답노트 따위로 가득 채워져 있었다수능은 나의 주님이었고이대로만 하면 구원 받을 수 있으리라 믿어 의심치 않았다. ‘자습은 밤 11시까지 이어졌고집에 도착해서도 마음 편히 쉴 수는 없었다그럴 때면 나는 긍정긍정열매를 잡쉈던 학원선생님으로부터 받은 책을 펼쳐보곤 했다.

 

<꿈꾸는 다락방>, <시크릿>, <스물일곱 이건희처럼>. 정말 주-옥같은명저들이었다이 책들은 하나 같이 내게 주문하고 있었다. “지금이 힘들다고 느껴지겠지만세상엔 너보다 힘든 일을 겪고 성공한 사람이 많아그러니 힘들다고 징징대지 말고너도 이 사람들처럼 열심히 하면 꼭 성공할 수 있을 거야.” 눼에눼에지당하신 말씀입지요나는 고작 이런 걸로’ 힘들다고 생각했던 자신을 반성하면서 다시 수능 공부에 열중했다그러나 나의 노력은 그들의, '양과 질이 다른 세빠시 신상 노력'과는 비교할 수 없던 것일까모의고사에서면접장에서논술에서 정답을 비켜나갈 때마다 나는 좌절할 수밖에 없었다. “내 노력이 부족했구나조금 더 노력했어야 했는데.”하고. (어쩌면 양과 질이 다른 노력을 하던 <미생>의 장그래의 이야기는 모든 자기계발서가 말하기 좋아할 성공담이 될지도 모르겠다. <미생> 열풍이 지나간 뒤에 장그래를 주인공으로 한 자기계발서가 연이어 출간될 거라고 장담한다.)

 

나는 대학생이 되었다그리고 이전보다 더 자주더 많이 내 노력과 열정이 쉽게 무너지는 장면을 목격해야 했다내 친구들도선배들도후배들도 노력한 만큼의 결과를 얻지 못했다많이 힘들어 했고 많이 아파했지만 우리들이 왜 아픈 것인지이 힘듦의 끝에 과연 성공이(혹은 성공 엇비슷한 결과라도있을지 의심이 가기 시작했다그러던 와중에 새학기 교제를 사러 갔다 베스트 목록에서 발견한 책 제목은 내 꼭지를 돌게 하기 충분했다. <아프니까 청춘이다>라니아프니까 청춘꼭지가 그 자리에서만 십팔연속 회전을 하고 살점이 떨어져나가기에 충분했다이유 모를 화가 나기 시작했다. “아프니까 청춘이라고내가 이렇게 힘든 이유가 고작 그거였어?”

 

저자인 김난도는 내 힘듦과 아픔이 당연하다고 말했다그러니 참으라고 말했다참고 견디면 성공할 수 있으리라고 말했다그러더니 세상 사람들은 그의 책을 힐링이라고 부르기 시작했다힐링은 무슨 그냥 뽕 한 번 거하게 맞은 거지카알 마-악쓰가 예전에 이런 말 한 적 있잖아종교는 인민의 아편이라고나는 어떤 부분에선 그에게 동의하고어떤 부분에선 동의하지 못하겠다그러나 21세기 한국에서단언컨대자기계발서는 가장 완벽한 인민의 아편입니다당시 아편은 진통제의 일종이었다아마 마르크스는 종교가 현실을 올바르게 인식하는 것을 막고현실에 순응하고 만족하며 살게 한다는 점에서 종교를 비판했을 것이다올지조차도 모르는 천국을 기다리면서. (일단 내가 이해하기론 그래.) 그러나 현대에서 아편의 끝판왕진통제의 끝판왕이 된 것은 <아프니까 청춘이다>류의 자기계발 담론이라고 생각한다끝에 있을지도 모르는 성공이 있다고 속이며현실이 힘들고 아파도 참고 견디면당신이 노력하면 반드시 빛을 볼 것이라고 말 하는 자기계발 담론그러나 이게 정말 맞는 말일까나는 아직 확신하지 않겠다다만나는 진통제가 치료에 도움이 될 때도 있지만진통제에 취해 수술 받기를 잊는다면환부는 더 곪아가기만 할 뿐이란 생각이 든다진짜 힐링은진통제에서 찾을 게 아니라 수술에서 찾아야 하는 것이 아닐까.

 

자기계발담론의 더 큰 문제는무언가를 이뤄내지 못하는 이유가 오로지 자기 자신에게만 있다는 자아비판을 청년세대에게 내면화해왔다는 데 있다그리고 그 자아비판 뒤에 이어지는 열심히 노력하지 않은 자에 대한 인민재판-. 힘들다는 말 뒤에는 "고작 그 정도가지고 뭐가 힘들어, 나도 다 겪어봤는데," "니가 좀 더 노력했으면 그런 일이 있지도 않지. 지방대? 그러니까 고등학교 때 열심히 공부했어야지." "내가 더 힘들어. 누군들 그 정돈 안 힘들겠냐? 그만 징징대고 그 시간에 영단어라도 하나 더 외우겠다." 자기계발 담론이 가르친 논리를 채택해 다른 이에게 그대로 되돌려준다. 내가 너무 힘들기에 누구의 상처에도 공감할 수 없다. 세상은 우리에게 힘들어도 노력하면 된다고 가르쳤다. 힘들다는 다른 이에게 돌려 줄 말은 "더 노력했어야지."하는 힐난과 질책 뿐이다. 그리고 그것이 내가 지난 수 년 간 들어왔던 말, 그대로이다. 누가 이런 우리를 탓할 수 있단 말인가? 20대가 누군가에게 공감하지 않는다고 비난하기 전에, 누구도 20대의 아픔에 공감하지 않고 "네 탓이야"라는 말로 어설프게 위로해왔다는 사실을 기억해야 하지 않을까.


그렇기에 많은 20대는 눈 앞에 펼쳐진 자신의 문제 앞에 당혹스러울 뿐이다. 비정규직? 그거 다 노력 안해서 그런 거잖아. 그 사람들이 더 노력했으면, 더 열심히 살았으면 애초에 비정규직이 되지도 않았겠지, 다들 열심히 노력해서 정규직이 됐는데, 그렇게 날로 정규직이 되려고 하면 안 되지. 그건 정규직에 대한 역차별 아냐? 익숙한 대사를 뱉지만, 나도 정작 정규직이 될 수 없을 것 같아 무섭고 서럽다. 그러나 차라리 내 탓을 해버리는 게 낫다. 그렇게 믿어버리면, 조금 더 노력해서 꿈을, 성공을, 행복을 얻을 수 있을 것 같다는 착각이 들거든.  그러나 그게 내 잘못이 아니라면? 그 사실을 받아들이는 게 오히려 더 힘들지도 모르겠다. 내가 지금까지 해온 것들, 해왔던 노력과 쌓아온 스펙들이 아무 소용 없을지도 모른다는 걸 인정하는 꼴이니까. 살아남기 위해 내가 할 수 있는 일이 매우 적다는 걸 인정하는 셈이니까. 


그래서 나는 그 모든 자기계발서를 찢어버리고 싶다. 내 선택이 아닌 일에서조차 내 책임을 묻고, 나의 가난함이 내 아버지의 자기계발 부족이라고 말하는, 그런 자기계발서를 찢어버리고 싶다. 내 노력만으로 좋은 직장에 정규직으로 취직해 먹고 살겠다는 건 정말 꿈일 뿐일지도 모르겠다. 아마도 나는 꿈을 향해 계속 빌빌대겠지만, 그래도 잔혹한 희망고문보다야, 무엇이 잘못됐는지 무엇 때문에 힘든지라도 알고 있는 편이 낫다고 믿는다. 거짓말과 헛된 유혹으로 점철된 희망이 무슨 소용이란 말인가. 그 책에서 어렵사리 얻은 희망이 현실 앞에서 절망과 좌절, 자책으로 뒤바뀔 때에 아프니까 청춘이야,라고 말해주는 게 대체 무슨 의미가 있을까. 지금 자기계발서를 찍어내시는 분들이 살아왔던 시절보다, 청년 세대가 살아 가고 있는 지금이 평균적으로 더 어려운 때 아닌가. 어떤 의미에선 그 시절이 편하고 아늑한 꿈이었다. 어찌 됐든 자기 몫 다하고 밥 벌어 먹고 살기가 지금처럼 어렵진 않았다. 단군 이래 최대의 스펙을 가졌다는 우리들이 왜 단군 이래 최대의 취업난을 겪고 있어야 하나. 그래도 우리보단 나았던 이들에게 어줍짢은 충고를 듣고 있어야만 하나. 이명박 전 대통령은 임기 내내 "내가 다 겪어봐서 아는데" 그 정도는 별 것 아니라고 이야기했었다. 진정한 자기계발의 화신이었달까. 그러나 당신이 겪어왔던 것처럼 보이는 현실이라도, 당신들이 겪어왔던 세대와는, 또 당신이 누렸던 것들과는 많이 다른 현실에서 살고 있습니다. 그러니 이제 더는 그런 위로 하지 마십시오. 시어머니 같은 아픈 현실보다 더 미운, 말리는 시누이 같은 아저씨들. 현실이 이렇게 된 데에 당신이 일말의 책임도 없다고 하시진 않으시겠죠. 전 당신들의 충고, 받을 생각 없습니다.


그러니 이제 그 오만한 충고, 들을 필요 없다고 생각한다. 그 자기계발서, 이제 읽지 맙시다. 그리고 읽지 않겠습니다. 청춘이라서 당연히 아프고, 너희들이 어른이 되려면 아직 수백 번은 더 흔들려야 한다고 말하는 당신. 태어날 때부터 아버지가 이병철이었던 사람처럼 살면 성공할 수 있다고 말하는 당신. 꿈은 이루어진다며 2002년 월드컵의 추억이나 파는 당신, 명확한 해답을 내줄 능력은 없으면서도 뭐든 목숨을 걸라고 말하는 당신. 당신들의 신화는 신화일 뿐입니다. 차라리 곰이 마늘과 쑥을 먹고 사람이 됐다는 신화가 더 믿음직스럽습니다. 


물론 당신이 지금 인생에서 가장 어두운 터널을 지나가고 있고자기계발서가 당신에게 유일한 희망일 수도 있다고 생각한다사회가 변하는 것보다 당신이 변하는 게 쉬울 수 있으니까. (물론 당신이 변하는 게 답이라는 확신은 누구도 해주지 못하지만.) 그렇다면 굳이 내가 당신의 손에서 <천 번을 흔들려야 어른이 된다>를 떼어 놓을 이유는 없다당신의 손이 아니라 어느 누구의 손에서라도 그럴 것이다그러나 당신이 더 이상 좌절조차 할 수 없는 때가 되었을 때가 된다면그 자기계발이라는 악마가 당신을 얼마나 괴롭혀왔는지 보게 될 것 같다그러나 나는 당신에게 이 한 마디는 꼭 하고 가겠다. “당신 탓이 아닙니다당신 잘못이 아닙니다아무 의미 없는 말일지라도자책하지 마십시오.” 아무 의미 없는 말일지라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