3월 26일, 언론이 참 아팠던 날이다. 1971년, 유신으로부터 1년 전. 언론은 제 기능을 잃었고, 권력의 애완견으로 전락했다. 시민들은 언론에 분노했다. 동아일보 앞에 모여든 서울대 문리대 법대 상대 학생회장단 등 30여 명은 언론화형식을 열며 이렇게 선언했다.
“이제 권력의 주구, 금력의 시녀가 되어 버린 너 언론을 슬퍼하며 조국에 반역하고 민족의 부름에 거역한 너 언론을 민족에 대한 반역자, 조국에 대한 반역자로 규정하여 반세기의 찬연한 전통에 한을 남긴 채 전 민중의 이름으로 화형에 처하려 한다.”
자신들의 기사, 자신들의 신문이 불타오르는 현장을 목격한 기자들의 충격은 대단했다. 기자들은 반성했다. 학생들의 시위에서 경찰이 쏜 최루탄이 터져도 한 마디를 쓸 수 없던 언론이었다. 중앙정보부가 신문사에 들어와 기사를 쓰지 말 것을, 기사를 뺄 것을 지시해도 예, 예 했던 게 언론이었다.
이후 동아일보 기자들은 언론 자유수호 선언대회를 열고 “수년 동안 강화된 온갖 형태의 박해로 언론은 자율의 의지를 빼앗긴 채 언론부재, 언론불신의 막다른 골목까지 내몰렸다”는 선언으로, 긴 싸움을 시작한다.
언론은 아프다
3월 26일, 여전히 언론은 참 아프다. 지금으로부터 2년 전, 세월호가 침몰했을 때 언론은 제 기능을 잃었다. 자극과 과장에 힘을 쏟았고, 정확한 사실은 정확하게도 없었다. 언론은 사태의 책임과 해결에 무관심했다. 관심은 시청률과 조회 수거나, 높으신 분의 시선이거나. 시민들은 언론에 분노했다.
KBS는 이렇게 보도했다. “박근혜 대통령이 체육관에 들어서자 실종자 가족들의 오열이 더 커집니다. 곳곳에서 쇄도하는 질문에 일일이 답을 해줍니다.” YTN은 이렇게 보도했다. “대통령의 말이 믿기지 않는 가족들에게는 직접 전화를 하겠다고 약속했습니다.” 그리고 어디에서도 쏟아지지 않았던, 환호와 박수 소리를 담았다.
실종된 것은 실종자들만이 아니었다. 언론 속 유가족들의 목소리 역시 실종되었다. 실종자의 학교를 찾은 언론은, 그의 책상을 뒤져 그 물건을 꺼내 인터넷에 전시했다. 사고의 원인을, 정부에 대한 분노를 다른 곳으로 돌리려는 흔적 또한 엿보였다. 과열과 과열. 이윽고 언론 내부에서 자성의 목소리가 나왔다.
누군가는 기자라서 죄송하다고 했고, 또 누군가는 저널리즘이라는 이름이 부끄럽다고 했다. KBS 기자협회는 이렇게 결의했다. “세월호 참사 한 달을 맞은 토론회를 열고, 세월호 관련 보도를 반성하는 미디어 프로그램과 9시 뉴스를 제작 방송하라. KBS뉴스의 정치적 독립성 확보를 위한 제도적 방안을 마련한다. 사장과 보도본부장은 즉각 퇴진하라. 이 요구가 받아들여지지 않을 시 제작거부에 돌입한다.”
KBS, 반성은 없었다.
그리고, 2년이 지났다. 그 통렬한 반성을 했다는 언론은 어떻게 달라졌을까. 공정한 방송? 정치적 독립성? 제작거부? 그건 잘 모르겠지만, 꽤 많이 달라졌다. 정말이다. 누군가의 가슴골이 충격적이라는 보도를 내보내던 언론이 이제, 누구의 비키니 몸매가 사이다라는 보도를 하고 있다. 천지개벽과 같은 변화 아닌가.
기자들의 반성은 정말 잠시뿐이었다. 정확히 말하자. 기자들의 반성은 있었는지 몰라도, 체제의 반성은 없었다. 결국, 제자리였다. KBS는 테러방지법을 반대하는 필리버스터에 대해 이렇게 보도했다. "국가안보 국민안전에 한목소리 내도 부족할 때 우린 뭘 하고 있는 걸까요?" 이렇게 묻자. 민주주의와 자유에 대해 한목소리 내도 부족할 때 KBS는 대체 뭘 하고 있었을까.
징계를 내리고 있었다. 자사 보도의 공정성에 의문을 표시하고, 문제를 제기한 이들을 상대로 한 징계였다. 필리버스터 무제한 토론이 시작된 이튿날, KBS는 언론노조 KBS 본부 공정방송추진위원회 간사 정홍규 기자, KBS 기자협회 공정방송국장 김범준 기자에게 감봉 6개월과 견책 징계를 내렸다. 이런 분위기에 맞서 싸울 수 있는 이는, 거의 없는 것 같았다.
고대영 사장의 취임 후, KBS의 보도는 점점 더 퇴행하고 있다. 정부에 여당에 대한 비판은 점점 더 자취를 감춰간다. KBS는 최근 들어 북한에 관한 뉴스 꼭지를 점점 더 늘려가고 있는 모양새다. 17에는 무려 6개를 내보내, 위협을 필요 이상으로 과장하는 게 아니냐는 비판을 받고 있다. 지상파의 TV조선이 되어 가고 있는 게 아닐까 싶을 정도다. 시청자들도, 내부 모니터링 단도 KBS의 '편향성'을 지적하는데, 내부에서는 아무런 조처를 하고 있지 않다. 2년 전 침몰한 KBS는, 심연 속으로 더욱더 깊게 빠지고만 있을 뿐이다.
언론, 화형당하지 않을 자격이 있습니까
비단 KBS의 보도만 문제인 것은 아니다. TV조선과 채널A의 보도는 말할 것도 없다. TV조선은 메인뉴스에서조차 악의적인 논평과 편집을 계속 이어가고 있다. 채널A도 마찬가지다. 지난 10월 민중총궐기 집회에 참여해, 최루액을 맞은 의경의 눈을 닦아주던 한 시민의 사진을 '의경 어머니'인 양 착각하게끔 편집해 방송을 내보냈다. 목적이 의심이 가는 보도였다.
여전히 수많은 매체들은 헉 소리 나고, 충격적이며, 아찔한 어뷰징 기사를 써댄다. 내가 글을 쓰는 이 순간에도, 그리고 당신이 이 글을 읽고 있는 그 순간에도, 포털의 인기 검색어에 따라, 알파고보다는 좀 덜 똑똑한 컴퓨터가 짜 맞춰 쓴듯한 기사들이 올라오고 있다. 아무것도 아닌 내용을, 잘도 클릭하고 싶게끔 만들어서 말이다. 소위 이야기하는 진보언론들 역시 이런 비판을 피해갈 수 없다.
1971년 3월 26일. “이제 권력의 주구, 금력의 시녀가 되어 버린 너 언론을 슬퍼하며 조국에 반역하고 민족의 부름에 거역한 너 언론을 민족에 대한 반역자, 조국에 대한 반역자로 규정하여 반세기의 찬연한 전통에 한을 남긴 채 전 민중의 이름으로 화형에 처하려 한다.” 시민들은 이렇게 선언했다.
과장된 제목과 부실한 기사, 허황된 내용과 이해불가능한 문장들. 이런 것들을 언론이란 이름을 단 곳들에서 쏟아내고 있다. 나는 궁금하다. 오늘날의 언론사들이 1971년의 3월 26일로 돌아간다면 과연 화형당하지 않을 자격이 있는냐고. 남김없이 불태워지지 않을 자격이 있느냐고 말이다.
<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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